2007-09-03
이제는 학문의 패러다임 전환할때
2007. 9. 3(월) - 기호일보 기고문 -
한국은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다. 아무리 깊게 땅을 파더라도 석유 한 방울이 나지 않는 척박한 자원환경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6·25라는 전쟁의 상처로 인해 세계극빈국의 위치를 경험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경제력의 측면에서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며, OECD 회원국인 동시에, APEC 등 다국적 회의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심국가로 부상했다.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국토의 통일과 그로 인한 안보위기, 국토의 규모와 부존자원의 열악성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경제적 성장은 기적이라는 단어로도 표현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은 그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류(韓流)’의 물결이 아시아를 넘어 지구촌 방방곡곡까지 파고들었다. 한국의 영화산업은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미국의 대형 영화사와 당당하게 경쟁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문화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산업적인 측면에서도 한국의 기업들은 세계의 기업들과 견주어볼 때 손색없는 실력과 저력을 자랑하고 있다. IT업계에서 한국 기업들은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조선, 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Made in Korea'의 제품들은 그 질과 브랜드 가치에 있어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은 다양한 분야에서 이제 국제사회의 인정받는 선도적인 중심국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한국이 저발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분야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학계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으며 현재 학문의 상아탑에서 연구하고 있는 교수진, 연구진 그리고 학생들의 수준은 상당한 편이다. 특히 의학이나 화학, 물리학 등의 일부 분야는 세계 최정상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학, 즉 한국의 정치·사회·문화·예술 등에 관한 연구는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한국학을 다루는 연구소만 90여 개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 연구소에서는 한 해에 약 200권 이상의 한국학 관련 서적들을 발간하고 있으나, 이에 비해 국내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대한 정부나 민간단체들의 지원은 미미한 수준이다. 연구 내용에 있어서도 미국과 일본, 유럽 등의 학계에서 한국과 관련해 제기하는 문제들을 국내에서 따라서 연구하는 종속적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학을 연구하는 세계적 학자들은 국내 학계보다는 오히려 외국 대학 및 학계에서 연구를 거친 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과 한국학에 대한 연구가 국내보다 오히려 국외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반성과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러한 와중에 지난 8월 23일부터 3일간 부산에서 ‘2007 한국학 세계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세계속의 한국: 민주주의, 평화, 번영, 그리고 문화’라는 주제로 개최된 이번 회의에는 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유수의 학자 100여 명과 국내학자 500여 명이 참가해 약 35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전에도 한국학과 관련한 국제학술회의는 몇 차례 있었지만, 이번에 개최된 한국학 세계대회는 몇 가지의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대부분의 국제학술회의가 10명 내외의 외국 저명학자들만을 기획 초청함으로써 국내학술회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 이번에는 100명이 넘는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자발적인 참여를 함으로써 외형적으로 국제학술회의다운 면모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둘째, 기존에는 외국학자 초청 시 항공편과 체류비 등을 주최 측이 모두 부담했던 반면, 이번 대회는 한 명도 예외없이 모든 해외 학자들이 일정 금액의 등록비를 부담하도록 함으로써 높아진 한국학의 위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발표된 논문의 주제들 역시 기존에는 문학이나 예술 등 특정한 학문분야에 치우쳤던 반면, 이번 학술회의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친 논문들이 발표됨으로써 진정한 한국학 관련 국제학술회의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국학은 세계 학문의 조류속에서 아직 변방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방적 위치를 극복해야만 진정한 학문적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 이번 한국학 세계대회를 시작으로 이제는 외국의 학문적 흐름을 단순히 답습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한국학의 아젠다(agenda)를 주도적으로 확립해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학을 연구하는 기존 국내학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 역시 더욱 활성화되어야만 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한국이 한국학의 메카로서의 진정한 위상을 확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07-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