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賊)들의 사회

등록일 : 2007-06-1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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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6. 18 (월)  - 기호일보 기고문 -

 전통사회에서 한민족을 이끌어왔던 지배적 이념은 유교사상이다. 사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는 표현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민족은 유순한 천성을 지녔다’라는 이미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유교의 행동규범적 관념인 예(禮)가 생활 속에 체화(體化)된 민족’이라는 타자적(他者的) 평가로부터 연유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근대화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유교적 이념보다는 근대의 서구의 관념과 철학에 더욱 친숙하게 되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의 폭발적인 인기의 비결은 한국인에게 보편화된 ‘유교적 전통사상은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인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구한말 망국의 역사를 닫힌사상과 닫힌사회의 결과로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국가체제를 500년 이상 지속시킨 전통의 정치사상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부정적인 자세 또한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전통사상은 극복하기보다는 재해석되어야 할 대상이 아닐까? 이 같은 생각에서 나는 동양고전을 읽는 것을 짬짬이 즐긴다.


 얼마 전 고전의 달고 신맛에 담뿍 빠져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문득 텔레비전의 뉴스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을 경고했다는 것이다. 듣고 있자니 청와대와 여당·야당 할 것 없이 자기 목소리 내기에만 바쁘고 ‘이런 일이 한 두 번인가?’ 하는 생각에 식상하기도 해서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읽고 있던 '맹자(孟子)'의 한 구절이 참 기가 막혔다. “吾君不能謂之賊 ” 즉, “우리 임금은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말하지 않는 것을 적이라 한다”라는 구절이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어진정치를 권하고 인(仁)과 의(義)를 이야기 하는 것이 본분인데, 만약 ‘우리 임금에게는 말해도 소용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바로 적(賊), 즉 국가를 망치는 도적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정치와 사회를 평가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아귀가 꼭 맞는 말이 있을까?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날로 자유로워졌다. 누구든 자기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인터넷은 이와 같은 대중의 여론을 쏟아내는 장(場)이 되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열린사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닫힌사회를 주도한 사상으로 평가되는 맹자의 단 일곱 자의 가르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오늘의 한국이 바로 이와 같은 적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정치부터 바로서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떤가? 이번 선거법위반 사례만 놓고 보자.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권한과 권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결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준비한다고 한다. 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과연 할 말인지 못마땅하다. 비록 대통령이 과거의 제왕과는 다를지라도 국가의 통치를 책임지고 국정을 운영하는 책임자라는 측면에서는 본질적으로 같다. 그런데 법치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사법질서와 국가시스템보다 정치적 승부수를 선택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국정최고책임자의 참모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될까? 그들은 다름 아닌 적(賊)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듣기도 전에 자기 핏대를 세우는 정치인들도 오늘의 열린사회를 오염시키는 적이다. 상생의 정치를 운운하고, 돌아서면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결국 파멸의 길로 이끄는 사회의 적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맹자도 그러했고 서구의 유명철학자인 칼 포퍼(Karl R. Popper)의 사상도 이와 같은 열린사회의 적들을 경계하고 있다. 포퍼는 독일의 나치즘과 구소련의 공산주의적 전체주의가 모두 이 같은 닫힌사회를 지향하고 법치와 국가제도를 무시한 적들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학문적 논의를 통해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정보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한국인들은 이 사회가 자연스럽게 열린사회로 발전해 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 국민 개개인이 정치인들의 막말을 쉽게 잊어버리고 책임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내리지 못한다면 사회의 질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인들의 역할과 성격을 선량(選良)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적으로 만들 것인지는 우리 스스로의 판단과 참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치즘은 독일국민들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오늘의 적들을 방관한다면 미래에도 ‘적들의 사회’가 계속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 책임의 무게감이 언제나 나의 마음 한 편을 묵직하게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