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수박

등록일 : 2007-05-08 작성자 : 최용길 조회수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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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5. 8 - 중부일보 기고문 -

  제가 노래방에 가면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강산에’라는 가수의 ‘할아버지와 수박’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를 향한 진한 그리움을 노래한 곡인데 ‘강산에’의 진면목이 드러난 대표곡 중의 하나입니다. 몇 번을 따라 부르며 어렵게 익히기도 했지만, 제대로 부르기가 쉬운 노래는 아닌 것 같습니다. 흔치 않은 가사 내용이니 한 번 들어보시길….


  며칠 전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 녀석이 마지막(?) 어린이날 기념으로 선물을 사달라고 졸라대서 이상하게 생긴 스케이트보드를 사주었습니다.‘S-board’라고 하더군요.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데 다칠까봐 이만저만 걱정이 아닙니다.


  엊그젠 부모님을 찾아뵙고 어버이날 인사를 미리 드렸습니다. 보드에 빠져있던 녀석도 용돈 잘 주시는 할머니 집에 간다니 부지런히 따라 나오더군요. 반갑게 맞아주신 어머니께서 ‘간장게장’ 생각이 나신다길래 서해대교 쪽 유명한 집을 찾아 나섰습니다. 어린이날에다 연휴라서 늘어선 차량이 만만치 않아 지루할 법도 했는데 고3 녀석 빼고는 오랜만에 모인 가족 나들이라서 좁은 차 안이 시끌시끌합니다. 한 시간 남짓, 건강 이야기, 학교 이야기, 선거 이야기가 나오더니 뒷좌석이 조용해집니다. 서해 쪽에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할아버지 무릎에 안겨 있던 막내 녀석이 잠이 들은 모양입니다.

“막내 잠들었나 보네요?”라고 말하려다가 룸미러를 슬쩍 쳐다보곤 전 이내 말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무릎에 잠든 손자 녀석 행여 눈부실까?’ 칠순이 넘어 뼈마디가 다 들어 보이는 굳은 손으로 손자 얼굴에 햇빛을 가리고 계신 수줍은 아버님 얼굴을 보고 말았던 것입니다. 거울로 눈을 마주치고 전 얼른 눈을 앞으로 돌렸습니다. 순간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만의 속마음을 느낀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도 참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신 아버지! 나보다 열 배는 순수한 영혼으로 맑은 세상을 꿈꾸며 살아오신 아버지! 능력 없는 가장이라는 바가지를 소주 한 병에 푸시면서, 앞마당 까만 하늘에 별들보다 더 반짝이던 눈물을 그렁그렁 괴던 아버지! 자식들은 대학 보내야 한다고 중동에 돈 벌러 떠나시곤 두 차례나 귀국을 연기하시던 아버지!

대학 1학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팔씨름을 이길 수 있었던 아버지의 그 엄청난 악력이 지금도 손아귀에 느껴지는데, 손자 녀석 햇빛 가리던 그 손등, 그 뻣뻣한 손가락들은 언제부턴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할아버지의 속마음이었던 것일 겁니다.


  고1 때였습니다. 집안의 일로 아버지와 둘이 대구엘 다녀오던 중이었습니다. 속이 좋지 않아 화장실에서 지체하는 바람에 천안에서 마지막 버스를 놓칠 뻔했었습니다. 떠난 버스를 택시로 따라잡아 간신히 수원에 도착했을 때,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따끈한 국물에 정종 한 잔, 그게 아버지와 마주한 첫 잔이었습니다. “남자는 술도 한 잔 할 줄 알아야지….” 집으로 들어가면서 영하 십 몇 도의 추위에도 얼굴은 벌겋게 마음은 따뜻하게….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어찌 가르칠까 늘 고민했는데 이제야 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주신대로 그대로 기르면 될 일입니다. 그저 믿음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제 아들이 좀 더 크면 ‘할아버지와 수박’, 이 노래를 가르쳐 줄 생각입니다. 잘 부르는 건 나중이고 좋아할까요?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