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굣길, 그리고 출근길

등록일 : 2007-03-09 작성자 : 최용길 조회수 : 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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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3. 9 - 중부일보 기고문 -


아침에 집안이 들썩들썩 합니다. 올해 고3이 된 큰 녀석이 아침 7시인데도 늦었다고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세수도 못하고 자동차를 몰았습니다. 중3이 된 둘째는 거울 앞에서 젖은 머릴 말린다고 부산을 떨고,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막내 녀석은 잠이 덜 깼는지 반쯤 감은 눈으로 밥을 먹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학교엘 달려 나가고,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대문을 나섰습니다.


출근길입니다. 차창 밖으로는 등굣길이 늘어섰습니다. 추운 날씨인데도 노랑 병아리 같은 녀석들이 시끌시끌 걸어갑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들입니다. 수원시 교육청을 지나 영화초등학교 앞을 지나갑니다. 어제 저녁, “새로 만날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길 해줄까?” 늦게까지 책을 뒤적이고 인터넷을 돌아다녔던 아내에게 한 마디 던집니다. “당신 참 행복하겠어, 저 녀석들 하고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야.” 알 듯 모를 듯 묘한 미소를 짓고 아내는 차에서 내렸습니다. 16대 국회에서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근무할 때, 박종희 국회의원이 가끔씩 던지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정치? 그건 우리 아이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닐까?”


아내와 늘 나누는 이야기지만, 교직은 참으로 성직(聖職)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죄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아이들을 잘못 이끈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교원평가제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고등학교에서도 교사를 선택하는 학교가 생겨나는 현실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교사에겐 아이들의 맑은 영혼이 먼저라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길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말씀이 한꺼번에 생각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지금의 동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던 선생님, ‘사랑은 모순을 융화하고 천지를 통합하는 길을 안다’고 전해주시던 선생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가르쳐주시던 선생님, 민주사회 시민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 열변을 토하던 선생님! 참 좋은 선생님들께 배울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들의 자랑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내 아이들도 이렇게 멋진 선생님을 만나기를 바라봅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출근이었고, 아직은 쌀쌀한 사무실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다보니 별 생각이 다 드는데, 오늘 아이들이 등교한 길, 제가 출근한 길은 이런저런 추억이 많은 길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3일 만에 지으셨다는 우리 집이 있던 길이고, 초등학교 때 상장을 받아들고 어머님께 뛰어가던 그 길입니다. 친구들과 고무신으로 송사리를 잡던 농수로가 있던 길이고, 어머님과 취로사업에 나서서는, 뒷산 퉁소바위에서 큰 돌을 날라다 망치로 자갈돌을 만들어서 리어카로 쏟아 붓던 그 길입니다. 연애시절엔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듣겠다고 지금의 아내와 이 길로 서울까지 걸어갔었는데, 10시간이 넘도록 무슨 이야길 그리 많이 했었는지?

살아가면서 별의 별 길을 다 걸어갑니다. 준비하고 계획한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한 길을 가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든 어떤 길을 가게 되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은 늘 그렇듯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엔 내 발자국이 남을 것입니다. 혹시나 내 아이들이 그 길을 따라온다면 적어도 부끄럽진 않은 발자국을 남겨줄 일입니다. 새 희망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 등굣길, 그리고 출근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