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굴종한 판사

등록일 : 2007-02-01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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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2. 1 - 경기신문 기고문 -


'긴급조치 판사' 명단 공개 사법부 자성 계기 삼아야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유신시대 긴급조치 위반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내렸던 판사들의 실명을 공개키로 한 것과 관련해 학계와 법조계, 시민단체 등에서 미묘하고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명공개를 찬성하는 측은 “당시 관련됐던 판사는 물론 공안검사도 몸가짐을 낮추고 공직에 나가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일부 법조인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도 없이 자리를 지키며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경우도 있지만 본인의 양심에 따르지 않고 정치적 구호나 권력에 따라 비(非) 양심적인 판결을 한 이상 용퇴를 결심하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반대하는 측에서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과 진실규명이라는 대의를 벗어나 자칫 여론 재판으로 흐르기 쉽다”면서 “이는 현재의 법관들이 현행 헌법과 법률에 따라 판결을 내리더라도 먼 훗날 비난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재판의 독립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며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명백히 밝혀져야 하는 불행한 역사인 것은 맞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재판부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법관들이 매도당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판사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이들의 주장은 모두 나름의 이유와 논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판단 결정권자는 바로 법관이다.

그들의 판단에 따라 구속과 불구속이 결정되며 죄 있음과 없음이 결정된다.

단군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라는 새만금 간척지 개발 사업이 법관한 사람의 판단에 의해 공사 중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 공사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지기도 했다.


최근 열린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재심에서 법원이 사형에 처해진 피고인 8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데 대해 검찰이 지난달 30일 항소를 포기함에 따라 피고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33년 만에 이들의 무죄가 확정됐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법조브로커 김흥수씨 사건에 차관급인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는 전대미문의 사건도 있었다.

그동안 적지 않는 판사들이 자기고백을 통해 사법부의 치열한 반성을 주문하고 모순을 지적해왔으며 현직 대법원장 또한 취임 일성을 통해 사법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천명하기도 했다.


과거 군주시대에 왕명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면, 현대에는 법관의 판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법관의 판결은 지고지순한 것으로 간주되며 우리사회에서 누구도 승복치 않으면 안 되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이 되고 있다.

따라서 법관에게는 고도의 도덕성과 독립성이 요구되며 최고의 선을 지키기 위한 시대적 소명의식이 뒤따라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유신시대 당시, 사표 쓰는 것 외에는 법관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 판결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판결은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법과 양심에 의해서만 판결을 해야 하는 것은 결코 훼손될 수 없는 사법부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법관은 판결로써 말한다”는 금언 속에는 법관의 독립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에 굴종해 판결을 내리고 현직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브로커에게 뇌물을 받고 판결을 내리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우리사회를 유지하는 근본원리는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사법부가 과거사 정리에 자발적으로 나서서 뿌리 깊은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일소하는 계기로 삼아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