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청산’ 미래 디딤돌 삼아야

등록일 : 2006-12-21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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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12. 21 - 경기신문 기고문 -


필자는 대학에서 역사학를 전공했다. 역사학은 세상을 넓게, 멀리 보는 안목을 주고, 도도한 시간의 흐름에서 한 점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깊은 교훈을 준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대학의 한국근대사, 그 중 독립운동사를 가르치시는 윤병석 교수님은 한국의 몇 안 되는 독립운동사 전문가로서 탁월한 식견과 높은 덕망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교수님께서는 고질적 한국병인 ‘기회주의, 배금주의, 무사안일주의’는 일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여 민족적 정기와 사회적 정의가 훼손된 원인이 가장 크다고 평가하신 적이 있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4대 입법 중 하나로 ‘과거사청산’이 등장한다. 과거사를 청산해야 한다, 불필요한 국론분열만 조장한다 갑론을박,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과거사에 대한 쌈박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국민적 대세였으므로 과거를 정리하기 위한 각종 법과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의 지난 100여 년을 1945년을 기준으로 나누어 과거사로서 정리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친일진상규명법(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국권침탈 전후부터 광복 이전(1945년 8월 15일)까지 행해진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진상을 규명해 역사의 진실과 민족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제정된 특별법이다.

또, 일명 ‘과거사(過去事)법’인 해방이후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은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적 통치시대에 이르기까지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공권력의 행사 등으로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국민의 화해와 통합을 이룩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이다.


지난 참여정부 5년 간, 매스컴을 통해 친일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과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을 접한 적이 있다. 역사학도로서 정말이지 어렵사리 제정된 법이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쓰여지기를 바랐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명(明)나라 말의 유학자 여곤(呂坤)은 그의 저서 「신음어(呻吟語)」에서 ‘청의(淸議)의 해독이 크다’고 갈파하였다. ‘청의란 깨끗하고 거룩한 주장이라지만 남을 비판하고 죽이는 정쟁의 한 방식이며, 청의(淸議)는 옥리(獄吏)보다 가혹하여 청의로 죄인이 되면 재심의 기회도 없다’고 꿰뚫어 보았다. 국민적 대세인 ‘과거사청산’을 내세워 그들만의 잔치인 ‘장사’를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각 부서에 생겨난 과거사위원회는 10개에 달하고 인원도 6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참여정부 5년 동안 과거사 정리와 관련해 6천억 원이 사용, 책정되었다. 또, 내년에는 과거사를 해외조사를 하겠다며 6억여 원을 예산을 신청했다.

돈을 물 쓰듯 하는 반면 그 투자대비 성과는 옹색하여 비판받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 위원회가 역사적 책임과 사회적 의무를 다 하지 못한다면 후일 역사에서 또 하나의 반민족행위로 평가받을 수 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지면을 통해 동학혁명의 단초가 되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증손녀가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교수라는 기사를 보았다. 그는 동학혁명관련 행사에서 증조부를 대신하여 머리 숙여 사과를 했다. 몇 년 전, 여당의 의장이 부친의 친일문제로 여당의장직을 사퇴하는 것도 보았다. 아버지를 독립투사로 ‘장사’했다가 오히려 부메랑을 맞은 국회의원도 있었다.

이를 통해 과거는 현재에도 유효함을 보여주었고, 과거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며, 그래서 더 신중하고 공정한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법이 목표하는 정신과 시대의 책임이 ‘과거’에 있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