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14
정지된 시간(時間)
2008. 4. 14(월) - 중부일보 칼럼 -
고교시절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이 반복될 수 없고 지금 이 자리에 다시 오더라도 그것은 그 때 그 자리가 아니다’라는 평범한 깨달음에 훌쩍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치 도(道)라도 통한 것처럼 공중부양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어낸 알렉산더처럼 그 때까지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모든 문제들을 단 칼에 해결한 것 같았습니다. 대학입시, 틀어진 친구 사이, 가족에 관한 문제, 심지어 죄와 양심에 관한 문제까지도 시원하게 풀어버린 경험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고민거리는 계속 생겨나고 심한 열병을 앓을 만큼 괴로운 적도 많았지만 그 순간들마저도 소중하게 기억합니다. 싫은 사람이 있긴 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만들지 않고, 햇빛 비치는 쪽은 물론이고 그림자 지는 쪽도 그만큼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경쟁하는 세상에서 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잊은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그렇게 알아주지 않으면 그 뿐, 강제로 알리려고 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더러는 시간(時間)이 멈춰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었습니다. 기쁨의 순간에도 그랬고, 아픔의 순간에도 그랬습니다. 이 기쁨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소박함과 이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애절함이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그 기쁨도 그 아픔도 그 때의 절절함으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은 그런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 순간순간은 여전히 소중하게 남아버렸나 봅니다.
또 가끔은 시간이 멈춰진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주변의 시간들은 분명히 흘러갈 텐데 내 시간은 도무지 흐르지 않는 듯한 그런 상황이 있습니다. 연극배우가 공연 후에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느낌이 그럴까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길에 폐지 수거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하얀 머리칼을 바라볼 때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면 영락없이 시간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멈춰져 있습니다. 군대 생활을 함께 한 전우들을 만나도 여전히 시간은 그 때부터 멈춰져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간이 가끔 멈추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몇 달 동안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고, 2주 동안 한 편의 신명나는 드라마를 찍었습니다. 40퍼센트를 약간 넘는 시청률이 아쉽긴 하지만, 상대편 드라마보다는 좀 더 내용이 있고 주인공이 좀 더 인기가 있었는지 경쟁에서는 이겼습니다. 탄생시킨 주인공이 시청자의 바람을 잊지 않고 본 무대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제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배우들이 하나 둘 씩 흩어집니다. 무대에서의 열정이 채 식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역할로 돌아갑니다. 관객들보다야 그 감동이 좀 더 오래 가겠지만 그래서 한참 뒤에 시간이 멈추어진 추억으로 남겠지만 불 꺼진 무대에 마냥 남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텅 빈 객석과 무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시간은 지금 이 순간 멈추어 있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조금은 이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물고 싶습니다. 환호하던 관객들뿐만 아니라 꾸짖던 관객들, 무심했던 사람들까지 한참을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이 내려오라면 내려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2008-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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