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의 불모지

등록일 : 2007-07-1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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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7. 15(일)  - 기호일보 기고문 -


'맹자(孟子)'의 이루(離婁)편에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 바로 ‘역지사지’로 그 뜻은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복잡한 인간관계로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 역지사지의 정신은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러나 현재 이랜드사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볼 때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노사문화에는 이 역지사지의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팽팽한 대립의 노사관계는 기업의 손해뿐만 아니라 타 기업의 손실 그리고 국민적인 불편함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마음까지 씁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노사관계는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의 삶은 아무런 보장이 없는 고단한 삶의 연속이었다. 노동3권이 인정되지 못했고, 근무환경 또한 열악했다. 역설적으로 한국의 노동자들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적 목적을 이루어낸 제일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민주주의의 이행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현상과 더불어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격차가 가속화되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의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합리적 수준의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 이와 같은 노동운동이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민들은 노동운동에 대해 노사분규와 파업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과 전체적 복지수준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 합의를 통해 국가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모두가 자신의 희생을 감수했던 기억들은 분명 긍정적인 측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이랜드사태는 이와 같은 국민들의 긍정적인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보다는 이전투구적인 이해득실의 계산과 귀를 닫아버린 자기주장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랜드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랜드사태는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노사 간의 갈등 표출이다. 비정규직이란 쉽게 말하자면 회사에 의해 신분이 보장되는 정규직과는 달리 필요에 의해 부분별로 고용되는 시간제, 임시직 등의 근로자를 말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화’와 관련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환란 당시에는 노사정 합의에 의해 일정 부분 비정규직의 확대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위기극복 이후 이에 관한 논의가 다시 과열되고 있는 것이다. 이랜드사태는 바로 이 같은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제도적 정비의 과정에서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하나의 산통(産痛)이다.


 문제는 상호간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측은 사측대로, 노측은 노측대로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불법시위라는 것도 문제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시기에는 불법적 행위가 아니고서는 노동자의 의견표출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심화단계에 이른 작금에도 이 같은 관성이 노동운동에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업의 손해와 노동자의 권리침해는 모두 국가적인 손실이다. 이제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지고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야 한다. 사측의 직장폐쇄나 노조의 장기파업으로 이어진다면 양측 모두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선진적인 노사문화를 가지고 있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노사정 삼자협의체를 그 특성으로 하고 있다. 경제적 위기를 겪었던 아일랜드와 같은 국가들은 이와 같은 협의제도를 안착시킴으로써 현재에는 유럽의 경제 우등생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한 이 같은 서구의 성공과는 달리 그 제도는 한국에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지만 그 실효성은 상당히 저조하다. 이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역지사지의 정신에서 생각하는 토론과 협상의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랜드의 사측과 노측 모두가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자기정당화를 위한 명분 쌓기에 치중하는 행태를 삼가하고 협상테이블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역지사지의 정신은 그 뜻을 알기는 쉬우나 실천하기는 어려운 덕목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호인정의 자세가 얽혀있는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문제해결의 첫걸음임을 노사 모두가 가슴 깊이 새겨 넣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