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8
한국전쟁 당시 중국개입의 예측 실패에 관한 연구
한국전쟁당시 중국개입의 예측실패에 관한 연구
1.서론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참전에 관한 많은 징후가 포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중공군의 개입을 예측하지 못했다. 연구의 대상기간은 중국이 군사개입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중공군의 제1차 공세까지 약 2개월간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오판하게 된 미국정보의 특성이나 결함에 관점을 두는 것이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고 실패의 재발을 두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것은 장차 사태를 시사하는 징후가 포착되었음에도 정보의 처리 및 사용이 적절치 못하여 일어난 정보의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다.
2.극동군사령부의 조직과 정보기능
(1)최고사령관과 참모부
1)맥아더의 권한과 정보책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일본을 통치하기 위하여 미 육군 참모총장은 미국과 영국, 중국, 소련 등 주요연합국의 결정에 근거하여 “미 극동군최고사령관” “연합군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1950년 7월7일 “유엔군사령관”에도 임명되었다. 미 극동 최고사령관으로서는 서태평양에 있어서 미 육.해.공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서는 일본을 주도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유엔군사령관으로서 미군, 한국군 및 유엔군에 참가한 각국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지위와 권한을 이용하여 맥아더는 극동에서 정보를 집중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맥아더의 정보책임구역은 미 육군 특별규칙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제1항에서, 극동군사령관은 일본 및 유엔 신탁통치에 있는 일본의 섬 및 필리핀의 섬을 제외한 모든 극동지역에 대하여 정보의 책임이 있음을 규정하고 있었다.
제2항에서는 그 외에 극동군사령관이 작전을 지휘하는데 전략적 가치가 인정되면 그 지역도 정보책임범위로 하였다. 이에 따라서 한반도와 필리핀도 포함되어 있었다. 육군 규칙으로 판단하면 한국전쟁 이전 한반도에 대한 정보우선순위는 군정을 받고 있었던 일본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2)일반참모부와 특별참모부
일반참보부와 특별참모부가 있었으나 실질적인 중국을 비롯한 극동의 모든 정보활동을 통제했던 기구는 일반참모부와 특별참모부를 통합한 FEC G-2였다. 한국전쟁이 발발 하면서 FEC G-2를 개편하여 극동군사령부의 미 육.해.공군과의 합동정보센터 기능을 강화하면서 정보업무를 총괄하고 통제하는 기구로 개편하였다.
FEC G-2는 중국을 비롯한 극동의 모든 정보활동을 통제했다.
(2)FEC G-2 정보활동의 역할
1)군사정보과의 역할
군사정보과는 번역.통역반과 기술정보반은 전쟁포로 심문, 노획문서 번역, 노획품조사를 실시하였다.
2)전술정보과
전술정보과의 임무는 “잠재 적을 포함한 모든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 평가, 분배하여 불확실한 상황을 가능한 줄이고, 상급기관, 극동사령부 예하 각 부대를 지원하며, 또한 극동의 모든 상황을 관찰하고 새로운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차후의 동향을 판단하여 육군성에 전술정보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3.극동에서의 HUMINT와 COMINT 기관
(1)HUMINT기관
1)극동에서의 CIA
CIA는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1949년 10월 모택동에 의해 중공정권이 수립된 후 거점을 요코스카이의 해군기지로 옮겼다.
한국전쟁 초기, CIA는 정보수집능력 면에서 군의 정보기관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FEC-G2와 CIA는 협력관계가 아니고 경계하고 긴장하는 관계였다. 결국 CIA의 약체를 배경으로 극동지역의 HUMINT활동은 결국 FEC-G2가 통제하게 되었다.
(2)COMINT기관
극동사령부는 COMINT의 수집에 관한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COMINT부대의 결정적인 약점은 1950년 1월경까지 암호해독에 필요한 중국어 자원이 배치되지 않았다.
4.극동사령부의 정보역할
극동사령부는 항공정찰과 노획문서의 조사, 포로심문, 피난민으로 부터의 청취를 통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1950년 10월부터 11월까지 항공정찰이 있었는데, 적정 확인을 위한 정찰보다 영내의 교량, 공업지대, 수송기관에 중점을 두었다.
10월20일 이후에야 압록강에서 예상접근로에 항공정찰을 실시하였다.당시 정찰을 주로 주간에만 했는데, 중공군은 야간에 포대자루를 쓰고 이동 하는 등 철저한 위장으로 극동사령부는 전혀 이동상황을 포착하지 못하였다.
5.극동사령부의 정세판단
극동사령부는 중국의 개입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주은래의 중공군개입발언 등 중국개입의 시그널이 있었음에도 때가 이미 늦었고 중국은 경제재건 이라는 과제 때문에 한국전쟁의 개입의 불가능성으로 보았다.
일일 보고를 통하여 그래프를 그리면서 사이클로 판단하였는데,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가도 곧바로 다음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등 우를 범하였다.
5.맺음말
극동군사령부 즉, 맥아더에 정보력이 너무 집중되었고,극동군사령부(정보생산자)의 오판과 정책결정자(정보소비자)의 오판이 얽혀 중공군 개입을 예측하는데 실패 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맥아더의 정보생산, 정보처리의 오류가 정보소비자의 실패로 귀결 되었다.
출처: 국방연구소 「한국전쟁(중)」이라는 자료를 보았는데, 중공군은 이미 참전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하였다라고 적시 되어 있었다.
이러한 판단근거는 웨이크회담에서 찿아볼 수 있다.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도에서 트루먼 미국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과 가진 회담의 주목적은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 가능성 여부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다음은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대한 맥아더의 답변 요지이다.
“북한군의 저항은 추수감사절까지는 종결될 것이다. 부연하여 설명하면 남한지역에 잔류한 1만5천명의 북한군 패잔병은 다가오는 겨울까지 소탕되거나 격멸 당할 것이다. 또한 북한은 그자들의 체면유지를 위해 훈련도 되지 않은 10만여 명의 보충자원으로 승산없는 전쟁을 계속 할 것이다. 때문에 평양이 곧 함락되면 나머지 적은 포위될 것이며 전쟁은 끝날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크리스마스 전까지 미8군을 일본으로 철수 시키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대답했다.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것은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중공은 만주에 30만 명의 병력을 주둔 시키고 있다. 그가운에 10만내지 12만5천명이 압록강변에 연하여 배치되고 있으며 이중 5~6만명이 압록강을 건널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보유하고 있지 않은 막강한 공군력으로 최대의 살육전을 펼칠 것이다”라고 답변하였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즉, 맥아더는 중공군개입을 불가능한 것으로 예측 했던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오정섭
2009-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