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4.19혁명 - 중부일보

등록일 : 2005-04-19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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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4.19혁명이 근 반세기로 접어 들며 서서히 빛이 바래져 가고 있다.
흔히들 4월의 혁명, 4.19의거, 4.19학생 혁명, 4.19민주혁명 이라고 불리어 졌으나 문민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혁명을 초래하게된 근본 원인은 종신 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지나친 정권욕과 독재성 및 그를 추종하는 아부 세력의 부패 정치와 나밖에 없다는 오만과 카리스마적 권위의식으로부터 발생 되었음이 자명한 사실이다.
12년간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헌법을 스스로 개헌하였으며 종신집권을 위하여 정치파동 및 정치적 비리를 자행 함으로서 국민의 지지를 서서히 상실케 했다.
6.25동란이 발발하자 서울 사수를 공헌 하고도 자신과 정부는 수도 서울과 국민을 버리고 피난함으로서 국민을 배신 했고 국민의 신망은 더욱 추락하였다.
1954.11월에 발생한 헌정 사상 유래가 없었던 사사오입 개헌은 재적의원 203명중 2/3인 136표 이상이 나와야 했으나 투표 결과 135표로 부결된 사항을 뒤집어 반올림시켜 136표로 가결 시킨 사사오입 개헌도 무자비하게 밀고 나감으로서 국민의 주권을 유린함은 물론 반헌법적 반민주적 행동으로 국민을 실망케 하였다.
1956.5.15일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인 신익희 후보의 급서로 정권 교체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부통령 후보인 장 면이 당선됨으로서 야당이 지지하는 국민여론에 자유당은 혼비 백산했을 것이다.

1960년 5월중에 치러질 정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가 외면 당했음을 알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신병 치료차 도미하자 그 틈을 타 3.15일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국민의 주권을 또 한번 유린하는 반인륜적 행위를 서슴치 안았으며 그 결정적인 도화선은 1960.2.28일 대구유세현장에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지시로 초중고생을 등교시켜 선거 방해를 시키는데서부터 발단이 되었다.
소박하고 순진무구하며 청순했던 학생들은 자신들을 정치도구로 활용하는 정치꾼들 작태에 단순히 항거했을 뿐이다.
시위 진압을 위한 무참한 폭력으로 인하여 마산 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자 이에 분노한 시민도 합세하여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으며 4월18일에는 고려대생 3,000여명이 의사당 앞에서 연좌 대모를 한 후 귀가 도중 정치 폭력배의 습격을 받아 1명이 죽는 불상사가 터지고 말았고 청년 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 궐기 하자는 선언문이 채택되어 4.19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정의로운 학생들은 조국의 민주를 위해 젊음을 불태웠으며 사망자 약100명 부상자 450명에 달하는 엄청난 희생을 가져온 민주 투쟁이었다.
무정부 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서울의 각 대학교수 259명의 시국 선언으로 일단락이 맺어졌으며 이기붕일가의 자살과 이대통령 하야와 함게 하와이로 극비리에 떠나야 했던 정의로운 의거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 처럼 근 반세기에 접어든 4.19혁명이 한국의 민주화 및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국의 앞날에 초계같이 목숨을 바친 정의로운 학생들의 피의 댓가였음 또한 분명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에 헌재의 위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정권 야욕에 불타는 정치꾼들의 작태를 보는 학생들의 시각은 어떠할지 궁금해 지는 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