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라에 대한 회상(回想) - 인천일보

등록일 : 2005-12-02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230
첨부파일 - 첨부된 파일 없음
 지난 여름 필자는 호주정치교류협회(APEC)의 ‘차세대정치지도자 교류프로그램’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돼 2주 정도 호주의 수도 캔버라를 방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캔버라, 수도라고는 하지만 거주 인구가 불과 30만명 정도인데다, 정부청사와 기관들이 밀집된 행정타운이 거주지역과 격리되어 있어 적막강산과 다름없어 보였다.

거기다가 필자 일행은 방문기간 동안 주로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황량함은 더했다. 그나마 캔버라에 있던 동안 하워드 총리를 비롯해 다우너 외무장관, 아베츠 정무장관, 더튼 고용촉진부장관 등 연방정부의 장관, 상하원 의원 등 호주의 저명한 정치지도자들을 만나고, 또 이들의 사무실을 전전하며 열띤 토론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에 ‘캔버라의 적막함’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었다.
필자가 그곳을 방문한 때는 마침 연방의회 총선을 마치고 첫 번째 열린 본회의 기간이어서 호주의 정치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본회의장에서는 하워드 총리와 제1야당인 노동당의 당수 킴비즐리 의원과의 불꽃 튀기는 설전을 포함해 여야간의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부정책을 놓고 정부여당과 야당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기본 형태는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다소 소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이기도 했지만, 총리 등 정부 각료들과 의원들이 권위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국민을 앞에 두고 직접 토론으로 맞붙어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모습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당시 쟁점은 노사관계법안과 전화통신공사(TELSTRA) 민영화관련 법안 처리 문제였다. 하워드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강화하고, 각 주별로 다른 노사관계제도를 전국적으로 단일화하고 일대일 개별 노동계약을 장려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노사관계 개혁안을 상원다수를 배경으로 밀어붙이려 했다. 이에 대해 노동당은 과도한 사용자 위주의 개혁이라면서 강력히 반대하면서 맞서고 있었다. 전화통신공사 민영화 법안에 대해서는 연립여당 내부에서도 교통정리가 되지 않아 상당한 혼선을 보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서로 다른 정당끼리 연립정당을 구성하는 것은 쉽지만 연립한 이후 서로의 입장을 조절하면서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실감되었다.
 
이렇게 하워드 총리가 수 십년간 보류되어왔던 이들 개혁법안을 일거에 처리하기 위해 서두르는 배경은 작년 10월 총선을 통해 여당이 상하원을 석권한 데 따른 정치적 자신감이다. 사상 유례없는 경제호황을 기록하고 있고 집권여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도도 높은데도 여당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정치적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는 개혁 의제, 노동관계법과 집권세력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민영화 추진에 투신하는 모습에서 호주의 밝은 장래를 느낄 수 있었다. 호주 정치지도자들이 우리 젊은 한국대표단에 대한 과분할 정도의 환대를 하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나마 납득이 됐다.
 
앞으로 호주가 동북아 경제시장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견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피하고 이를 위한 교두보로서 우리나라의 역할, 그리고 장차 우리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이들은 국제정세를 자국의 이익이라는 확고한 기준하에 냉정하게 보고 있었다. 우리 국내 정세에서부터 남북통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도 그러한 시각에서 출발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필자를 포함한 우리 일행들은 확실히 부족함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호주에서의 경험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큰 책임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